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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부노 다다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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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부노 다다미네는 10세기 초 일본 헤이안 시대의 가인이다. 《고금와카집》의 선자로 발탁되었으며, 《와카구품》에서 상품상으로 평가받고, 《습유와가집》의 권두가에 작품이 실리는 등 당대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급 무관 출신이었으나, 후지와라노 사다쿠니의 수신을 지냈고, 그의 아들 미부노 타다미 역시 가인으로 활동했다. 대표작으로는 오구라 백인일수에 수록된 "동이 틀 무렵 무정하게 돌아서 헤어진 후 날이 밝는 것보다 괴로운 것은 없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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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부노 다다미네
기본 정보
壬生忠岑 (기쿠치 요사이 그림, 『전현고실』)
壬生忠岑 (기쿠치 요사이 그림, 전현고실)
시대헤이안 시대 전기 - 헤이안 시대 중기
생년조간 2년 (860년) 경
몰년엔기 20년 (920년) 경
관위무위, 우위문부생
씨족壬生 씨
자녀타다미
특기 사항36가선 중 한 명이다.
기타 정보
일본어 표기壬生 忠岑 (みぶ の ただみね)
로마자 표기Mibu no Tadamine

2. 생애 및 가계

미부노 다다미네는 신분이 낮은 하급 무관이었지만, 가인으로서 고금와카집의 선자로 발탁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고금와카집 목로쿠』에는 정외선부, 육위·셋쓰 권대목에 임명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아들인 미부노 타다미에 대한 기록으로 여겨진다.[3] 다다미네 본인은 우위문부생으로 임관한 것이 확실하다. 야마토 이야기에 따르면 후지와라노 사다쿠니의 수신이었다고 한다.[4]

후지와라노 킨토가 저술한 『와카구품』에서는 최고 등급인 상품상에 미부노 다다미네의 노래가 꼽혔다. 『습유와가집』의 권두가에도 그의 노래가 선정되었는데, 이는 칙찬집의 권두가에 황족이 아닌 사람의 노래가 실린 이례적인 경우로, 그만큼 그의 평가가 높았음을 보여준다. 가학서인 『와카십종』을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10세기 후반 이후에 미부노 다다미네의 이름을 빌려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고금와카집(34수) 이하의 칙찬와가집에 81수가 수록되었으며[5], 가집 『충금집』을 남겼다.

2. 1. 가계

선조는 불명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고 여겨진다.[3] 자식으로는 36인 가선 중 한 명인 미부노 타다미가 있다.

2. 2. 생애

미부노 다다미네는 신분이 낮은 하급 무관이었지만, 가인으로서 일류로 평가받아 고금와카집의 선자로 발탁되었다. 『고금와가집 목로쿠』에는 정외선부, 육위·셋쓰 권대목에 서임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가선전』, 『충견집』 등에 따르면, 이들 관직에 오른 것은 아들인 미부노 다다미였다고 하며, 『목로쿠』의 기재는 의심스럽다고 여겨진다[3]。확실한 것은 고금와카집 「가나서」를 비롯하여, 여러 사료에서 보이는 우위문부생으로의 임관뿐이다.

또한, 『야마토 이야기』에 따르면 후지와라노 사다쿠니의 수신이었다고 한다[4]

후세에 후지와라노 사다이에, 후지와라노 이에타카로부터 『고금와카집』의 와카 중에서도 수려하다고 작풍을 평가받고 있다. 후지와라노 킨토가 저술한 『와카구품』에서는, 상품상이라는 최고위의 예가로 미부노 다다미네의 노래가 꼽히고 있다. 『습유와가집』의 권두가에도 뽑혔는데, 통상적으로 천황이나 황족의 노래를 올려 의례적 의의를 높이는 칙찬집의 권두가에 미부노 다다미네의 노래가 선정된 것은, 그만큼 그의 평가가 높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가학서로서 『와카십종』을 저술했다고 여겨지지만, 최근에는 10세기 후반 이후, 『습유와가집』 성립 무렵에 미부노 다다미네에게 가탁되어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고금와카집(34수) 이하의 칙찬와가집에 81수가 수록되었으며[5], 가집 『충금집』을 남겼다.

3. 평가 및 작품

미부노 다다미네는 고금와카슈 편찬자로 발탁될 만큼 뛰어난 가인으로 평가받았다. 후지와라노 긴토는 『와카구품』에서 그의 노래를 최고 수준인 상품상으로 꼽았다. 『습유와가집』 권두가에도 그의 노래가 선정되었는데, 이는 칙찬와가집에서 천황이나 황족의 노래를 우선 싣는 관례를 깬 것으로, 그의 높은 평가를 보여준다.

대표작으로는 오구라 백인일수에 실린 다음 와카가 있다.


  • 有明のつれなく見えし別れより暁ばかり憂きものはなし|아리아케노 쓰레나쿠 미에시 와카레요리 아카쓰키바카리 우키 모노와 나시일본어: 동이 틀 무렵 무정하게 돌아서 헤어진 후 날이 밝는 것보다 괴로운 것은 없네.[3]


『와카십종』을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10세기 후반 『습유와가집』 성립 무렵에 그의 이름을 빌려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고금와카집』(34수) 등 칙찬와가집에 81수가 수록되었으며,[5] 가집 『충금집』을 남겼다.

3. 1. 당대 및 후대의 평가

미부노 다다미네는 신분이 낮은 하급 무관이었지만, 뛰어난 가인으로 평가받아 고금와카집의 편찬자로 발탁되었다. 『고금와가집 목로쿠』에는 정외선부, 육위·셋쓰 권대목에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가선전』, 『충견집』 등에 따르면 이러한 관직에 오른 것은 아들 미부노 다다미네였던 것으로 보이며, 『목로쿠』의 기록은 의심스럽다고 여겨진다.[3] 확실한 것은 『고금와카집』 「가나서」를 비롯한 여러 사료에 보이는 우위문부생으로의 임관뿐이다.

또한, 『야마토 이야기』에 따르면 후지와라노 사다쿠니의 수신이었다고 한다.[4]

후세에 후지와라노 사다이에, 후지와라노 이에타카는 『고금와카집』의 와카 중에서도 미부노 다다미네의 작품이 수려하다고 평가했다. 후지와라노 긴토가 저술한 『와카구품』에서는 상품상이라는 최고위의 예가로 미부노 다다미네의 노래가 꼽혔다. 『습유와가집』의 권두가에도 뽑혔는데, 천황이나 황족의 노래를 올려 의례적 의의를 높이는 칙찬집의 권두가에 미부노 다다미네의 노래가 선정된 것은 그만큼 그의 평가가 높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가학서로서 『와카십종』을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10세기 후반 이후, 『습유와가집』 성립 무렵에 미부노 다다미네의 이름을 빌려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고금와카집』(34수) 이하의 칙찬와가집에 81수가 수록되었으며[5], 가집 『충금집』을 남겼다.

3. 2. 와카십체(和歌十体)

和歌十体일본어는 미부노 다다미네가 지은 와카 비평서이다.

새벽녘에 무정하게 돌아선 후 헤어진 뒤, 날이 밝아오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없네.

有明のつれなく見えし別れより暁ばかり憂きものはなし일본어

3. 3. 대표작


  • 有明のつれなく見えし別れより暁ばかり憂きものはなし|아리아케노 쓰레나쿠 미에시 와카레요리 아카쓰키바카리 우키 모노와 나시일본어: 동이 틀 무렵 무정하게 돌아서 헤어진 후 날이 밝는 것보다 괴로운 것은 없네.[3]


위 시는 오구라 백인일수에 실린 미부노 다다미네의 대표작이다.

참조

[1] 서적 Kokinshū: A Collection of Poems Ancient and Modern https://books.google[...] Cheng & Tsui 1996
[2] 서적 Seeds in the Heart: Japanese Literature from Earliest Times to the Lat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9
[3] 서적 王朝文学の考証的研究 風間書房 1973
[4] 문서 大和物語 125段
[5] 문서 勅撰作者部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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